쥘 마자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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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쥘 마자랭은 본명은 줄리오 라이몬도 마차리니로, 이탈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추기경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교황청 외교관으로 시작하여, 루이 13세의 수석국무장관 리슐리외 추기경의 뒤를 이어 프랑스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30년 전쟁을 종식시킨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에 기여하고, 프랑스-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하여 피레네 조약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는 등 프랑스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또한, 프롱드의 난을 진압하고 루이 14세의 절대왕정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예술 후원에도 힘써,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많은 작품을 수집했으며, 166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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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 마자랭 | |
---|---|
기본 정보 | |
존칭 접두사 | 그의 에미넌스 |
이름 | 쥘 마자랭 |
직책 | 국무 장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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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 루이 13세 오스트리아의 안 (섭정) 루이 14세 |
선임자 | 리슐리외 공작 |
후임자 | 장바티스트 콜베르 |
출생 이름 | 줄리오 라이몬도 마차리노 |
출생일 | 1602년 7월 14일 |
출생지 | 나폴리 왕국 아브루초 울트라 페스키나 |
사망일 | 1661년 3월 9일 |
사망지 | 프랑스 뱅센 |
모교 | 로마 대학 |
직업 | 성직자, 정치가 |
임기 시작 | 1642년 12월 4일 |
임기 종료 | 1661년 3월 9일 |
종교 지도자 정보 | |
유형 | 추기경 |
직함 | 추기경, 메스 주교 |
관구 | 교황청 직속 |
교구 | 메스 |
관할 지역 | 메스 |
임명일 | 1653년 11월 29일 |
임기 종료 | 1658년 |
선임자 | 앙리 드 부르봉 |
후임자 | 프란츠 에곤 폰 퓌르스텐베르크 |
기타 직책 | 클뤼니 수도원 원장 (1654년–1661년) |
추기경 임명일 | 1641년 12월 16일 |
추기경 임명자 | 교황 우르바노 8세 |
지위 | 부제급 추기경 |
좌우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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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가톨릭교회 |
추기경 스타일 | |
추기경 이름 | 쥘 레몽 마자랭 |
예우 스타일 | 그의 에미넌스 |
공식 스타일 | 당신의 에미넌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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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할 지역 | 메스 |
기타 정보 | |
로마자 표기 | 줄리오 마차리니 |
별칭 | 레텔 공작 마이엔 공작 네베르 공작 |
본명 | 쥘 레몽 마자랭 |
다른 이름 | 줄리오 마차리노 |
아버지 | 피에트로 마자리니 |
어머니 | 오르텐시아 부팔리니 |
전문 직업 | 정치가, 귀족 |
출신 대학 | 그레고리오 대학교 |
2. 어린 시절
'''줄리오 라이몬도 마차리니'''(Giulio Raimondo Mazzariniit)라는 본명으로 이탈리아 나폴리 왕국의 페시나에서 태어났다. 6명의 자식들 중 맏아들이었다. 로마에서 예수회 교육을 받았고, 스페인에서 수학하였다.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제휴한 콜로나 가족의 보호와 성원으로 1624년 교황령 육군에 입대하였으나 1620년대 후반에 성직자의 시초적 서약을 택하여 교황령의 외교관이 되었다.
쥘 마자랭은 1630년 만토바의 왕위 계승 분쟁을 둘러싼 스페인과 프랑스 간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협상에서 교황령 교섭인으로 활동하던 중, 루이 13세의 수석국무장관 리슐리외 추기경을 만나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 마자랭의 뛰어난 협상 능력은 그를 프랑스 왕실 대신의 총애를 받게 했고,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일시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1638년 로마에서 프랑스 대표로 자신의 업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루이 13세는 마자랭을 추기경으로 임명하기 위해 교황을 압박했고, 1641년 12월 16일에 추기경 직위를 받았다. 추기경 임명 과정에 있는 동안, 루이 13세와 리슐리외는 마자랭을 프랑스 국왕을 섬기도록 프랑스로 초청했다. 로마를 떠난 마자랭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1640년 1월 파리에 도착했다.
1648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프롱드의 난은 마자랭과 안 도트리슈의 섭정 정부에 대한 복합적인 국내 반란이었다. 이 반란은 파리의 법정 재판관들로부터 시작되어 귀족, 왕자, 그리고 지방과 파리의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반란의 원인은 새로운 세금 징수, 왕실 권한에 대한 견제, 그리고 지방 심의회 장교들에 대한 왕실의 불신 등 다양했지만, 특히 마자랭과 안 도트리슈를 권좌에서 몰아내려는 목적이 컸다.
쥘 마자랭은 루이 14세 시대에 프랑스의 외교 정책과 국제 질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루이 13세의 사망 이후 섭정인 오스트리아의 안느의 지원을 받아 수상이 되었으며, 리슐리외 추기경의 정책을 이어받아 프랑스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만들었다.[7]
마자랭은 17세기 프랑스에서 루이 14세 다음으로 예술의 후원자였다. 1648년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를 설립했다.[9] 1661년 사망 후, 마자랭 궁전에 있던 그의 미술품 소장 목록에는 그림 858점, 조각상 128점, 흉상 185점, 그리고 카펫 150점, 보석과 고급 은제품 514점, 귀금속 317점이 기록되어 있으며, 유명한 마자랭 다이아몬드는 제외된 수치이다. 그는 이 다이아몬드를 루이 14세에게 물려주었다. 그의 소장품에는 르네상스부터 그의 시대의 주요 프랑스와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작품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수집품에는 푸생, 루벤스, 코레조, 반다이크, 티치아노 등 많은 작가들의 작품과, 잉글랜드의 찰스 1세가 소유했었고 리슐리외가 매입했던 라파엘의 유명한 ''발다사레 카스티글리오네의 초상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망 직전, 그는 그의 부관 브리엔과 함께 마지막으로 그의 미술관을 방문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 나의 불쌍한 친구여, 나는 이 모든 것을 남겨야만 합니다. 작별입니다, 나에게 많은 비용을 들였고 내가 매우 사랑했던 사랑하는 그림들이여." 그가 소유했던 많은 그림들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보호자이자 정치적 선도자로서 마자랭은 루이 14세에게 왕권의 기묘를 가르치고, 프랑스를 다스리는 데 그를 준비시켰다. 또한 자신의 사망 후 왕실을 섬길 미셸 르 텔레에와 장바티스트 콜베르 같은 충성적인 조언자와 능력있는 장관들을 루이 14세에게 마련해주었다.[16] 1661년 3월 9일 파리의 교외에 있는 뱅센에서 58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국내와 국제 정치에서 더욱 강하고, 더욱 안정된 프랑스의 영예를 남겼다.[16] 루이 14세는 마자랭의 사망에 다른 수석국무장관을 임명하지 않을 것을 선언, 국왕으로서 자신의 개인적 통치를 시작하였다.[16]
마자랭은 보호자이자 정치적 선도자로서 루이 14세에게 왕권의 기묘를 강의하고, 미셸 르 텔레에와 장바티스트 콜베르 같은 충성스러운 조언자와 능력 있는 장관들과 함께 국왕을 준비시켜 프랑스를 다스리는 데 기여했다. 1661년 3월 9일 파리 교외의 뱅센에서 58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국내외 정치에서 더욱 강하고 안정된 프랑스의 영예를 남겼다. 루이 14세는 그의 사망 후 다른 수석국무장관을 임명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여, 국왕으로서 자신의 개인적 통치의 명확한 출현을 알렸다.
[1]
웹사이트
Mazarin
https://www.collinsd[...]
HarperCollins
2019-07-29
그의 아버지 피에트로 마자리노(Pietro Mazzarino, 1576~1654)는 1590년 시칠리아에서 로마로 이주하여 나폴리 왕국의 총사령관인 필리포 1세 콜론나 가문의 궁정 관리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1608년 로마 시민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 오르텐시아 부팔리니(Ortensia Bufalini, 1575~1644)는 로마 출신으로, 기원이 움브리아의 치타 디 카스텔로에 있는 귀족 가문인 부팔리니 가문 출신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고용주인 필리포 1세 콜론나의 대모였다.
콜론나 가문의 영향으로 줄리오는 일곱 살에 로마에서 가장 명성 있는 학교인 예수회 콜레지오 로마노에 입학했다. 그는 학업에서 뛰어났고, 1618년, 열여섯 살에 그 해에 나타난 혜성을 설명하는 이론에 대한 공개 강연을 했다. 연극에도 뛰어났으며, 종교 행사에서 새로 성인이 된 이냐시오 데 로욜라 역할을 맡았다. 그는 또한 카드 놀이에 빠져 종종 빚에 시달렸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로마의 나쁜 영향으로부터 멀리 보내기로 결심했다. 줄리오는 필리포 1세 콜론나의 아들 중 한 명인 열여덟 살의 지롤라모 콜론나와 함께 스페인의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당시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 위치)로 갔다.
3. 교황령 교섭인
만토바 계승 전쟁에서 마자랭이 휴전 협정을 깨고 진군한 리슐리외의 부대 앞에 단신으로 나타나 휴전을 호소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631년 체라스코 조약에서 황제와 사보이아 공작은 만토바 공작 찰스 곤자가의 만토바와 몬페라토 일부 소유와, 포 강 계곡으로 가는 관문인 전략 요새 피네롤로의 프랑스 점령을 인정했다.
만토바에서의 성공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교황은 스페인과 프랑스 간의 지속적인 평화 결정 실현을 목적으로 마자랭을 파리 주재 교황 대사로 임명했다. 파리에 있는 동안 리슐리외와 마자랭은 상호 유익한 정치적 관계를 시작했다. 1634년에는 교황 특사로 파리에 파견되어 리슐리외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1635년 리슐리외가 30년 전쟁에서 스페인과의 전쟁 정책을 채택하면서 마자랭은 평화 임무에 실패하고 교황에게 소환되었다. 교황령에 돌아온 후에도 마자랭은 프랑스와의 정치적 관계를 유지하며 프랑스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대변했다.
로마로 돌아온 후 법학 공부를 시작하여 1628년 민법과 교회법을 모두 다룰 수 있는 ''in utroque jure''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페르디난트 2세가 발텔리나를 차지하려 하자, 우르바노 8세는 영토 방어를 위해 군대를 일으켰고, 마자랭은 팔레스트리나 공작이 지휘하는 교황군 연대에 중위로 임명되었다. 군사 경험이 부족했던 마자랭은 전선에서 먼 도시에 배치되었고, 지휘관의 허락 없이 로마로 돌아갔다가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고 교황 사절로 임명되었다.
1639년 프랑스에 귀화했고, 1641년 루이 13세의 추천으로 우르바누스 8세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4. 추기경 겸 리슐리외의 대리
프랑스 왕실에서 마자랭의 외교적 목적은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그의 초기 시절은 국내 정치적 불안정의 시기였으며, 1642년 12월 리슐리외의 사망과 1643년 5월 루이 13세의 사망으로 위기가 닥쳤다. 1643년 5세의 루이 14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섭정인 스페인 여왕 안 도트리슈는 섭정 정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그가 성년이 되어 왕실의 완전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까지 수탁 지위에서 국왕의 정치적 권위를 보유했다. 리슐리외의 부하이자 루이 14세의 후견인이었던 마자랭은 수석국무장관이 되었고, 약하고 취약한 섭정 정부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긴밀한 정치적 파트너로서 여왕과 함께 일했다. 학자들과 동시대인들은 수석국무장관과 여왕 사이에 더 친밀한 관계가 발전했다고 추측했지만, 그들의 관계의 정확한 본질에 대한 확증은 없다.
마자랭은 파리에 도착하자 국왕, 리슐리외 추기경, 그리고 마자랭이 정기적으로 향수, 부채, 장갑 및 기타 선물을 보냈던 왕비 오스트리아의 안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당시 왕비는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고, 루이 13세가 사망하면 섭정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이미 있었다. 마자랭은 정치 및 문화적 문제에 대해 리슐리외에게 조언을 했다. 그는 로마에서 파리로 예술가들을 초청할 것을 권했고, 1640년에는 로마의 조각가 베르니니에게 리슐리외의 흉상 제작을 의뢰하여 베르니니에게 리슐리외의 그림을 보냈다. 리슐리외의 흉상은 1641년 8월에 도착했다. 마자랭은 그것이 완벽하며, 너무나 생생하여 "말하려는 듯했다"고 썼지만, 프랑스의 취향은 바로크 양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궁정의 다른 구성원들은 그 작품을 비난했고, 마자랭은 베르니니에게 다시 편지를 써서 리슐리외의 그림을 더 보내고 다시 시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리슐리외는 마자랭을 여러 차례의 중요한 외교 임무에 파견했는데, 그중에는 복잡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보이로의 장기 여행도 포함되었다. 루이 13세의 여동생인 크리스틴 사보이 공작 부인의 섭정은 그녀의 처남인 모리스 왕자와 토마 왕자에 의해 도전받았다. (피에몬테 내전 참조) 마자랭은 크리스틴의 지위를 성공적으로 확보하고 사보이와 프랑스 간의 견고한 동맹을 수립했다. 이 임무로 인해 그는 1641년 6월까지 9개월 동안 파리를 떠나 있었다. 1641년 12월 16일, 마자랭은 40세 생일이 되기 전에 가장 원했던 것을 얻었는데, 바로 추기경으로 공식 임명된 것이다.
그는 리슐리외와 화목한 관계를 맺었다. 리슐리외는 그를 농담으로 ''린자마''(그의 이름의 애너그램), 또는 ''눈지니카르도''("친애하는 작은 사절"), 또는 가장 자주 ''콜마르두치오'' 또는 ''콜마르도''라고 불렀다. 그 의미를 묻자, 그는 프랑스어로 ''프레르 꾸프슈''(수도원 부엌에서 양배추를 썰도록 배정된 수도원 후보 수련자를 의미하는 용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그는 마자랭을 유럽 전역의 평화 회의에 프랑스 대표로 파견하는 임무에는 보내지 않았다. 리슐리외의 관심은 전쟁에 쏟아졌다. 고령에 건강이 좋지 않았던 리슐리외는 건강이 좋지 않았던 국왕, 궁정, 그리고 마자랭과 함께 카탈루냐의 반란을 진압하고, 루시용을 점령하고, 1642년 1월에는 나르본을 포위 공격하기 위한 일련의 장기 군사 원정에 나섰다.
1642년 6월 11일, 장기 군사 원정 중 하나에서 타라스콩에 있던 중, 마자랭은 루이 13세의 형제인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 그리고 국왕의 가장 가까운 고문 중 한 명인 생크마르 후작이 리슐리외나 국왕 몰래 스페인 국왕과 비밀 협정을 맺었다는 증거를 제시받았다. 왕비인 오스트리아의 안네도 이 리슐리외에 대한 배신을 알고 있었지만, 리슐리외나 국왕에게 알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생크마르는 체포되었고, 가스통은 망신을 당했으며, 다른 음모자였던 부용 공작은 음모의 모든 세부 사항을 마자랭에게 밝히고 중요한 요새인 세당을 국왕에게 넘겨주는 조건으로 사면을 받았다. 마자랭은 왕비의 음모 가담을 밝히지 않았지만, 그의 지식은 궁정에서 그의 영향력을 더욱 높였다. 국왕에 대한 음모의 진압은 리슐리외 추기경의 마지막 행위 중 하나였다. 그는 병에 걸려 1642년 12월 4일에 사망했다.
1630년, 만토바 계승 전쟁에서 일시 휴전 협정을 깨고 진군한 리슐리외의 부대 앞에 마자랭이 단신으로 나타나 휴전을 호소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1634년, 교황 특사로 파리에 파견되었을 때 리슐리외의 신임을 얻었다.
1639년 프랑스에 귀화하고, 1641년 루이 13세의 추천으로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1642년 리슐리외, 1643년 루이 13세가 연이어 죽자, 섭정이 된 왕태후 안 도트리슈의 고문 겸 루이 14세의 교육자가 되었다. 공식적인 임명장은 없었지만, 실질적인 수상이나 다름 없었다. 앙네와는 비밀 결혼을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고도 전해지며, 루이 14세는 마자랭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지만, 앙네가 루이 14세를 임신한 1637년 12월 5일에는 마자랭이 아직 이탈리아에 있었기 때문에 근거 없는 소문이다.
5. 프롱드의 난
프롱드의 난이 진행되는 동안, 마자랭과 섭정 정부를 비판하는 '마자리나드'(Mazarinade프랑스어)라는 풍자적인 팜플렛이 프랑스 전역에 유포되었다. 1649년, 마자랭은 안 도트리슈, 루이 14세와 함께 파리를 탈출해야 했고,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반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654년 랭스 대성당에서 16세의 루이 14세가 대관식을 치르면서 마자랭은 파리로 귀환하여 수석국무장관의 지위를 완전히 회복했다.
프롱드의 난 중에도 마자랭은 프랑스의 외교 정책을 지휘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전쟁을 지속했다. 마자랭은 합스부르크 가에 대항하여 독일 왕자들과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는 정책을 추진했고, 1659년 피레네 조약을 통해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평화를 이루었다. 1660년 루이 14세와 스페인 공주 마리아 테레사의 결혼은 이 평화를 더욱 공고히 했다.
마자랭은 합스부르크가와의 전쟁을 위해 자금을 마련해야 했고, 그의 재정 고문 미셸 파르티첼리 데메리(Michel Particelli d'Emery)는 세금, 대출, 작위 매각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그는 파리 시민들이 도시 경계 밖에 집을 짓는 것을 금지하는 오래된 법률을 이용하여 도시 경계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벌금을 부과했고,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상품에 세금을 부과했다. 특히 귀족들에게는 특별세를 부과하여 그들의 분노를 샀다.
파리 파르망은 귀족들의 의회이자 고등항소법원으로, 마자랭의 조치에 저항하는 중심이었다. 파르망 의원들은 인신 보호 영장에서 영감을 받은 선언문을 발표하여 왕의 사법관들의 권한을 폐지하고, 파르망의 승인 없이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할 수 없도록 했다. 안 도트리슈는 이 회의를 금지했지만, 파르망은 회의를 강행했다. 1648년 8월 26일, 랭스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특별 미사 중에 안 도트리슈는 피에르 브루셀을 포함한 파르망 지도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는 파리 시민들의 봉기를 촉발했다.
프롱드 기간 동안 파리의 반마자랭 군중들은 마자랭을 조롱하는 노래인 마자리나드를 즐겨 불렀다. 마자랭은 유머 감각이 있어 프롱드가 끝난 후 가장 좋은 마자리나드를 모아 궁전에서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반란은 3년간 지속되었으며, 아이들이 돌을 던지는 데 사용한 돌팔매(frondes)에서 유래한 '프롱드'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반란은 가스통 도를레앙, 콩데 공 루이 2세, 폴 드 곤디 등 다양한 인물들이 이끌었지만, 모두 마자랭을 몰락시켜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1649년 마자랭은 콩데와 그의 군대를 파리로 데려와 도시를 포위하고, 파르망에게 많은 개혁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평화를 제안했다. 파르망 지지자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왕실 가족과 마자랭의 귀환을 허용했다. 그러나 많은 프롱드파들은 이 타협에 불만을 품었고, 콩데는 안 도트리슈에게 계속해서 요구를 하다가 결국 쫓겨났다. 곤디 추기경은 콩데를 설득하여 마자랭과 안 도트리슈를 함께 축출하려 했고, 마자랭은 이를 알아채고 1650년 1월 18일 콩데와 그의 형제, 매부를 체포했다.
마자랭은 독일로 망명하여 프랑스에 있는 정보원들을 통해 안 도트리슈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의 전략은 프롱드의 여러 파벌 사이에 불신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콩데의 정치적 무능력 덕분에 마자랭은 유리한 위치를 점했고, 결국 파리로 돌아왔다. 콩데는 보르도에서 군대를 조직하여 파리로 진군했지만, 튀렌느(Turenne)이 지휘하는 여왕에게 충성하는 군대에 포위되었다. 그랑 마드무아젤의 도움으로 콩데의 군대는 파리에 입성했지만, 폭동이 일어나 진압되었다. 파리 고등법원은 콩데에게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요구했고, 콩데는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갔다.
1652년 10월, 루이 14세는 어머니, 튀렌느와 함께 파리에 재입성했다. 마자랭은 신중하게 계획된 귀환을 기다렸고, 파리 고등법원은 마자랭의 해임을 요청했다. 마자랭은 이를 받아들이고 망명 생활을 기다렸다가 1653년 2월 파리로 돌아와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권력을 회복한 마자랭은 조카들을 유력 가문과 결혼시켜 자신의 세력을 강화했다.
6. 외교적 업적과 정책
마자랭은 30년 전쟁을 종식시킨 베스트팔렌 조약(1646~48)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알자스 대부분을 프랑스 영토로 편입시켰다.[7] 또한,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라인 동맹을 결성하여(1658)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였다.[7]
프랑스-스페인 전쟁에서는 잉글랜드 공화국의 보호청 올리버 크롬웰과 동맹을 맺고 스페인에 승리하여 피레네 조약(1659)을 체결, 아르투아와 루시용을 프랑스에 추가하였다.[7] 이 조약의 일환으로, 1660년에는 루이 14세와 스페인 공주 마리 테레즈(마리아 테레사)의 정략결혼을 성사시켜 양국 간의 평화를 공고히 하였다.[7]
마자랭은 베스트팔렌 원칙을 확립하여 국가 간의 주권, 영토, 내정 불간섭, 법적 평등과 같은 현대 국제법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7]
국내적으로는 프롱드의 난(1648-1653)을 진압하여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훗날 루이 14세의 절대왕정의 기반을 다졌다.[7] 또한, 장바티스트 콜베르를 등용하여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프랑스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7. 문화 예술 후원
마자랭 궁전(Palais Mazarin)은 마자랭이 수상이 된 직후인 1643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는 프랑수아 망사르에게 튀베프 오텔의 서쪽 끝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2층짜리 회랑이 있는 정원 날개를 추가하도록 의뢰했는데, 이곳에서 그는 그림과 고대 조각을 포함한 자신의 미술품을 전시할 수 있었다. 1645년부터 1647년 사이에 그는 이탈리아 화가 조반니 프란체스코 로마넬리에게 위층 회랑의 천장에 오비디우스 작품의 장면을 그리도록 의뢰했다(많이 수정되었지만, 현재는 갈레리 마자린으로 알려져 있다).[11]
1721년, 마자랭 궁전은 왕의 도서관(Bibliothèque du Roi), 즉 현재 프랑스 국립 도서관 리슐리외관이 되었다.[12]
마자랭은 파리에 이탈리아 음악을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자랭 이전에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파리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거나 인정받지 못했다. 1643년 수상으로 부임한 후, 그는 유명한 소프라노 레오노라 바로니와 카스트라토 아토 멜라니를 초청했다. 멜라니는 외교관 역할도 했는데, 마자랭은 그를 유럽의 다른 궁정으로 여러 차례 비밀 임무를 보냈다.[13] 마자랭의 노력으로 1645년부터 1662년 사이에 파리에서 7편의 이탈리아 오페라가 공연되었다. 1645년 마자랭은 유명한 무대 디자이너 자코모 토렐리를 파리로 데려와 사크라티의 오페라 ''가짜 미치광이''를 공연했다.[14] 1647년 카니발 기간에 그는 루이지 로시의 ''오르페오'' 초연을 성대하게 제작했다. 나중에 토렐리는 오페라보다 ''궁정 발레''에 더 많이 참여했는데, 이는 왕의 춤에 대한 열정을 반영한다. 토렐리의 프랑스에서의 경력은 1661년에 종지부를 찍었는데, 그는 몰리에르의 ''싫증난 사람들'' 세트 작업에 참여했고, 이 작품은 니콜라 푸케가 왕을 기리기 위해 보 르 비콩트에서 개최한 성대한 축제의 일부로 공연되었으며, 이 과도하게 화려한 전시는 결국 푸케의 투옥으로 이어졌다.[15]
마자랭은 또한 유명한 서적 수집가였다. 1646년, 그는 9,000권의 장서를 파리로 가져와 자신의 저택에 설치했다. 이는 왕의 도서관 다음으로 파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서관이었다. 그러나 마자랭이 프롱드 기간 동안 파리를 떠나야 했을 때, 그의 도서관은 프롱드 지도자들에게 압수되어 해체되었다. 그러자 그는 남은 것으로 두 번째 도서관을 시작했다. 도서관은 25,000권 이상으로 성장했고 1643년 이후 모든 학자들에게 개방되었다. 이 도서관은 프랑스 최초의 진정한 공공 도서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유언에서 자신이 1661년에 설립한 사대학에 자신의 도서관을 기증했다. 그의 도서관의 원래 책장들은 사대학 건물이 세워졌을 때 사대학의 열람실로 옮겨졌다.
8. 친족 관계
쥘 마자랭은 본인이 성직자였기 때문에 독신이었지만, 여동생 제로라마 마짜리니(Gerolama Mazzarini)의 다섯 딸인 라우라(Laura Mancini), 올림피아(Olympia Mancini), 마리(Marie Mancini), 오르탕스(Hortense Mancini), 마리 앙느(Marie Anne Mancini)를 정략결혼에 이용했다. 이들 중에는 루이 14세의 측실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남동생 폴(Paul Mancini), 필립(Philippe Mancini) 또한 군인, 귀족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누나 라우라 마르게리타 마짜리니(Laura Margherita Mazzarini)의 딸인 앙느 마리(Anne Marie Martinozzi), 라우라(Laura Martinozzi) 자매 또한 정략결혼에 이용되어 각각 콩데 공작 알망 드 부르봉(Armand de Bourbon, prince de Conti), 모데나 공 알폰소 4세 데스테(Alfonso IV d'Este)와 결혼했다. 이들 7명의 조카딸들은 마자리넷(Mazarinettes)이라고 불렸다.
1645년, 만토바 공작 샤를 곤자가(Charles II Gonzaga, Duke of Mantua and Montferrat)의 고모인 마리 루이즈 곤자가(Marie Louise Gonzaga)는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Władysław IV Vasa)와 결혼하였다. 마자랭과 장바티스트 콜베르는 샤를로 하여금 빚을 청산하게 하기 위해 1654년 메이엔 공국을, 1659년에는 네베르 공국을 매각하게 하였다. 돈지 공국(Duchy of Donzy)과 레텔 공국도 함께 매각되었다.
9. 사망
말년에 마자랭은 주로 루브르 궁전에 머물렀다. 루브르 궁전 소회랑의 주요 그림 갤러리인 루아 왕조 회랑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그림이 소실되었고, 마자랭을 크게 실망시켰으며, 이것이 그의 쇠퇴의 시작이었다.[16] 그의 주치의가 죽음이 가까웠다고 알리자 마자랭은 "얼마나 남았소?"라고 물었고, 의사는 "두 달입니다"라고 대답했으며, 마자랭은 "충분하오"라고 답했다.[16]
마자랭은 여러 장의 유언장을 준비해 두었다. 궁정의 적들이 루이 14세에게 그가 왕에게 정당하게 속한 돈을 가져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루이 14세에게 상속한다는 내용을 공개적으로 남긴 첫 번째 유언장을 준비했다. 마자랭은 아마도 왕이 자신의 멘토이자 수상의 재산을 모두 가져가는 것이 너무 부끄러울 것이라고 계산했을 것이나, 왕은 사흘을 기다린 후 그것을 거절했다. 마자랭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프랑스 영토에 새로 편입된 네 개의 새로운 주 출신 학생들을 위해 설립한 콰트르나시옹 대학 설립에 상당한 금액을 기부한다는 내용의 또 다른 유언장을 준비했다. 현재 프랑스 학술원이 된 이 대학은 결국 루브르와 센 강을 사이에 두고 바로 맞은편에 세워졌으며, 마자랭은 자신의 유해가 그곳에 매장되기를 원했고, 오늘날에도 돔 아래 대리석 기념물에 안치되어 있다.[16] 이 대학은 프랑스 아카데미를 포함한 프랑스 5개 아카데미의 본거지이다.
10. 유산과 평가
1645년, 만토바 공작 샤를 곤자가(Charles II Gonzaga, Duke of Mantua and Montferrat)의 고모인 마리 루이즈 곤자가(Marie Louise Gonzaga)는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Władysław IV Vasa)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합의된 2,100,000 리브르(French livre)의 지참금을 지불할 만큼의 돈이 없었다. 그 결과, 그들은 루이 14세에게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고, 메이엔 공국(Duke of Mayenne), 네베르 공국(Duchy of Nevers), 레텔 백작령 및 공국(County and Duchy of Rethel)이 이를 위해 저당 잡혔다. 마자랭과 장바티스트 콜베르는 1654년 샤를로 하여금 메이엔 공국을, 1659년에는 네베르 공국을 매각하게 하여 이 빚을 청산하게 만들었다. 돈지 공국(Duchy of Donzy)과 레텔 공국도 함께 매각되었다. 그리하여 1660년 10월 18일, 사망하기 5개월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마자랭은 프랑스 공작이자 프랑스 귀족으로 인정받았다.
마자랭의 사망 당시 개인 재산은 엄청났는데, 그의 조카들에게 남긴 돈을 제외하고도 3,500만 리브르에 달했다. 이는 그 세기에서 두 번째로 큰 개인 재산이었다. 그의 재산의 37%는 휴대가 간편한 보석과 현금이었다. 루브르 궁전 그의 방에서는 고품질의 진주, 금 체인, 십자가, 귀중한 돌이 박힌 반지 등이 발견되었다. 그는 가족에게 약 250만 리브르 상당의 보석을 남겼고, 왕대비에게는 "잉글랜드의 장미"를 선물했다. 200만 리브르 상당의 "마자랭"으로 알려진 18개의 다이아몬드 세트를 포함한 가장 귀중한 유산들은 루이 14세에게 주어졌다.
마자랭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스물 년 후》와 《브라젤론 백작》에서 주요 등장인물로, 탐욕스럽고 교활하며 왕비의 애인으로 묘사된다. 그는 레티시아 엘리자베스 랜던의 역사 소설 《프란체스카 카라라》, 라파엘 사바티니의 소설 《이본느의 구혼자들》, 에릭 플린트와 앤드류 데니스의 《1634: 갈릴레오 사건》, 에릭 플린트와 월터 H. 헌트의 《1636: 추기경의 미덕》, 아서 코난 도일의 1921년 셜록 홈즈 단편 소설 "마자랭 보석의 모험" 등 다양한 문학 작품에 등장한다. 또한, 마이클 아이언사이드가 연기한 2005년 드라마 시리즈 《젊은 검객들》, 제라르 드파르디유가 연기한 홀마크 영화 《여성 근위병》,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어제의 섬》, 연극 "천국의 빈센트", 1960년대 프랑스 TV 시리즈 《기사 템페스트》, 에드워드 러더퍼드의 소설 《파리》, 마르시 제퍼슨의 소설 《파리의 마법사》 등 다양한 미디어에서 주요 인물 또는 조연으로 등장한다.
정책적으로는 리슐리외를 계승하여, 후대 루이 14세의 절대왕정의 기반을 다졌다. 외교·군사 면에서는 합스부르크가와의 대항을 중시하여 30년 전쟁에 개입,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알자스 대부분과 베르댕, 메스, 툴을 프랑스 영토에 편입하였다. 1659년에는 잉글랜드 공화국의 보호청 올리버 크롬웰과 연합하여 프랑스-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을 패배시키고, 아르투아와 루시용을 프랑스 영토에 편입하였다(피레네 조약). 1660년에는 루이 14세와 스페인 공주 마리 테레즈(마리아 테레사)와의 정략결혼을 실현하였다. 국내에서는 프롱드의 난을 진압하여 대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재정 면에서는 콜베르를 등용하여 중상주의를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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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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